김영하의 소설 ‘퀴즈쇼’의 주인공은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편의점 주인의 시선에 전율하고 증오한다. 고시원 쪽방에 살고 있는 백수 청년은 편의점에서 철야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다급한 행인 커플을 돕기 위해 금고에서 돈 4만원을 꺼내주고 명함을 받는다. 알고 보니 그것은 완전히 사기였다. 금고와 연결된 경보장치 소리를 듣고 가게에 나온 점주는 한심하다는 듯 주인공 청년을 노려보며 야단을 친다. 문제는 주인의 시선!
‘나는 말투보다 나를 바라보는 점주의 그 눈빛에서 충격을 받았다. 만약 당신이 한 인간을 서서히 파멸시키고 싶다면 그런 눈빛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눈빛이며, 앞으로 그가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 눈빛이며, 혹시 그런 존재가 되더라도 적어도 자신만큼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을 멩세하는 눈빛이다. 만약 그런 눈빛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가 있다면 그 삶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런 눈빛을 가진 교사 밑에서 배우는 아이라면 자신감이라는 감정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은 경멸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것은 경멸에 들어가는 에너지조차 아까워하는, 얕은 수준의 감정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고, 필요하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을 때나 생겨나는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이에 대해 불문학자 박정자는 이런 멋진 사족을 단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와 인식을 갖고 있다. 남들이 하찮게 보고 있지만 실은 뛰어난 장점도 갖고 있고, 지금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겨우 고시원 쪽방에서 살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든지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그 많은 견해와 인식들이 타인의 시선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은 나의 여러 가지 실존적 가능성 가운데 하나만을 대상으로 고착시킨다. 그것은 작가 김영하의 말마따나 ‘앞으로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 그런 시선이다.”
박정자가 말하는 ‘그런 시선’이란 경멸의 시선이다. 한 사람이 느낌과 경험과 기억의 총체임을 싸그리 부인하는 시선. 한 사람을 하나의 사물로 고착시키고, 미래의 가능성을 죄다 박탈하는 시선.
비뚤어진 시선을 받는다면 식물들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사람은 물론 금수도 마찬가지다. 하늘의 시선이 투명하니 비로소 말이 살찌지 않는가. 가을은 투명한 시선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