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즈 파스칼의 말이다.

“마음에는 이성(理性)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머리[理性]’가 결정을 내리는 것 같지만 실은 ‘가슴[感情]’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

‘가슴은 무의식적 사고요, 즉각적인 사고다. 일종의 직감이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첫 느낌이 안 좋다는 것은 일종의 직감이다.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도 없다. 그 사람의 어떤 체취가 ’내‘ 무의식의 레이더망에 걸렸을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젖먹이 시절,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사람에게서 풍기던 냄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머리(이성)‘는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다. 이성은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낸다. 가치관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등,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등…사실 이런 합리적인 이유를 대고 있을 때, 우리의 이성은 잠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더 정확히는 감정이 내린 결론을 사후수습하고 있을 뿐이다.

2.

머리(이성)가 한심하게도 그럴싸한 명분을 찾고 있다고 해서 이성을 팽개치고 가슴[감정]으로 결정을 내리라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가슴이 머리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가슴의 결정, 몸의 결정, 본능적이고 직감적인 결정만큼 정직한 것도 없지만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일조량이 많은 날은 월스트리트의 주식중개인들은 모험적인 투자를 감행하는 성향이 높아진다고 한다. 반대로 흐린 날은 소극적으로 투자하는 성향이 높아진다고 한다. 물론 주식중개인들의 이성(理性)은 제 스스로 독자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하지만, 날씨에 반응하는 감정이 투자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3.

감정은 감정의 길이 있고, 이성은 이성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길은 감정과 이성이 원탁회의를 하는 자리다. 이성의 폐해를 지적하는 신비주의자들은 가슴의 요구에 정직하게 응하라고 한다. 반대로 과학을 앞세우는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응원한다.

4.

길을 가다가 매장에 전시된 어떤 차가 마음에 들었으면 그것은 가슴의 결정이다. 머리는 합리적인 명분을 찾아낸다. 갑자기 내 차가 낡았다고 생각한다. 위험성이란 단어도 생각해본다. 이성은 얼마나 부지런한가. 결국 머리[이성]는 여러 가지, 차를 바꿔야 할 이유들을 찾아낸다. 이때 가슴과 머리[가슴]를 연결하는 소통의 통로를 찾지 못하면 가슴의 결정도, 머리의 결정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칠칠치 못한 결정을 나는 얼마나 자주 범했는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런 오류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고 장담을 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