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에 대한 노트

1.

기댈 수 있는 것은 항구적인 것, 고정적인 것, 딱딱한 것이지

액체성, 흐느적거리는 유동성이 아니다.

유동성과 액체성은 불안의 이유다.

2.

썩어 문드러지는 살을 육탈시켜 썩지 않는 뼈를 묻음으로써

어떤 불변하는 것이 내세에도 계속되기를

인간은 바란지도 모르겠다.

3.

나뭇잎이 흔들리고, 머릿칼이 날리고,

깃발이 휘날리고…..

무수한 현상들의 배후엔

‘기압의 변화에 따르는 공기의 이동’이라는

간명한 추상적 원리가 존재한다.

바람이라는 간명한 추상성.

4.

추상화는 단순화다.

속도. 가속도, 밀도, 온도라는 개념은 추상의 산물이다.

언어 역시 추상의 산물이다.

프로그램 언어 역시 추상의 산물이다.

염기서열 역시 하나의 언어요, 그 역시 추상의 산물이다.

모든 구체성, 지상에 존재하는 표현형은 그 어마어마한 수량만으로도

지성에게는 하나의 족쇄요 억압이다.

세계와 우주를 감당하기에 메모리는 늘 턱없이 부족하다.

5.

과학자와 예술가는 무수한 구체적 형상 속에서 어떤 것들을 골라잡는다.

관습적 세부와 무의미한 세부를 발라버리고 전체를 대표하는 어떤 추상적인 틀을 뽑아낸다.

6.

물리학자 하이젠베르그의 말이다.

“더 큰 일반성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추상성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은 더 간결하게 말한다.

“현상은 복잡하다. 법칙은 단순하다. 버릴 게 무엇인지 찾아내라.”

7.

사상(捨象), 개별자의 특성을 제거하고 버리는 추상화 작업이

고수(高手)의 칼에 의해 세심하게 진행되면

추상은 그 간결함으로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준다.

이 천변만화하는 불가해한 세계에서

인간이 예측가능한 믿음을 얻어낸 것도 결국 추상을 통해서다.

8.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전환해서 그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 ‘부정확성’을 배우고 싶다. 그걸 거짓말이라고 부르겠다면 그대로 좋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말이다.

9.

“자연은 구, 원뿔, 원기둥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다”라고 세잔이 말할 때

그는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추상적 형상을 말하고 있다.

직관으로 잡아챌 수 있는 기하학적 질서.

10.

현실이란 모든 가능한 추상의 총제이며

우리는 이 가능성을 알아냄으로써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1.

하나의 좋은 획처럼 추상은 가장 경제적인 길을 간다. 가장 군더더기가 없는 길을.

12,

“우리는 삶의 의지와 더불어 스스로 외적 대상, 외적 형태에 전이시키는 동안 우리자신의 개별적 존재로부터 해방된다. 우리는 고유한 개별성이 개별적 의식의 끝없는 구분을 없애버리는 대신 다른 분명한 경계들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자아의 객관화는 몰아를 내포한다.일상적인 언어에서 말하듯이,나는 자신을 잊고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것이다.”(추상과 감정이입,빌헬름 보링거)

* 사진은 E.J. Marey의 ‘Geometric Chronophotograph of the man in the black suit, 1883년작’이다. 프랑스의 생리학자였던 E.J. Marey는 사람이 움직일 때 뼈나 관절의 위치가 어떻게 변하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는 모델에게 전신을 덮는 검은 옷을 입힌 다음, 그 옷 위에 사지의 주요한 뼈를 따라 하얀 선을 그었고 주요 관절부에 하얀 점을 크게 찍었다. 사진에 나타난 모습은 육체가 사라진 점과 선의 집합이었다. 추상이 된 것이다. 인간의 동작을 고도로 추상화한 그의 작업은 영상공학은 물로 인체공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참고: 미셀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에코의 서재)은 추상을 음미하기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