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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솜씨에 맞춰 생각할까 봐

이 시리즈 · 오늘도 짭니다 · 6화 (전체 6화) 연재중

"짜면서 드는 생각을 적습니다"

  1. 1화 평목의 일
  2. 2화 부처님 손바닥
  3. 3화 오늘도 짭니다
  4. 4화 형식을 계속 바꾸면 차이는 소음에 묻힙니다.
  5. 5화 톱길이 잡히기 전에
  6. 6화 내 솜씨에 맞춰 생각할까 봐

두밀이를 밀 때는 머리 모양이 중요합니다. 창호의 기품이 거기서 나옵니다.

계란 모양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밀다 보면 머리가 눌립니다.


못 만든 게 아닙니다. 계란 모양을 내긴 냈습니다. 다만 계란이 아닙니다. 멀리서 보면 모르고, 실패로 잡히지도 않습니다. 기품만 조금 내려앉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몇 번 눌리고 나면, 다음에 궁리할 때 눌린 계란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만드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대략 셋입니다. 솜씨, 안목, 그리고 만든 것을 설명하고 내놓는 일. 큰 조직은 셋을 나눠 맡지만 작은 공방은 한 사람 안에 다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직업이 목수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셋을 한 사람이 갖추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하니까요.

셋 다 갖추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겁내는 건 순서입니다.


순서는 안목이 먼저입니다. 무엇을 만들지 눈이 정하고 손이 따라갑니다. 그래야 손이 자랍니다.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압니다. 아는데 뒤집힙니다.

머릿속에 형태가 떠오릅니다. 그 다음 순간 곧바로 다른 생각이 붙습니다. 이걸 어떻게 짜지. 이 연장으로 되나. 공정이 몇 개나 늘지.

그리고 덜어내기 시작합니다.


떠오르지 않은 게 아닙니다. 떠올랐습니다. 떠오른 다음에 깎인 겁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무엇을 버렸는지 압니다. 알면서 버립니다.

버릴 때마다 이유가 붙습니다. 공정이 늘어난다. 단가가 안 맞는다. 이 연장으로는 그 모양이 안 나온다. 하나하나 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작습니다. 살 하나 굵기, 모서리 하나, 밀이 머리 몇 밀리. 판단할 거리도 안 되는 크기입니다. 크게 한 번 포기했으면 억울하기라도 할 텐데, 이건 그날로 잊힙니다.

작은 것들이 쌓입니다. 쌓인 다음에는 되짚을 수가 없습니다. 크게 잃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처음 생각과 다른 물건이 서 있습니다.

여기서 연장 탓을 하고 싶어집니다. 대패가 못 내는 모양이 있고 톱이 못 가는 선이 있으니까요.


배울 때 옆에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누가 가져온 도면에 정원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골밀이 대패는 한 종류뿐입니다. 그 대패가 내는 곡이 정해져 있으니 정원은 나오지 않습니다.

목수는 연장에 맞춰 일해야 한다. 그때 들은 말씀입니다.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연장을 모르고 형태부터 그리면 물건이 안 나옵니다. 저도 그 말로 배웠습니다.

다만 그 말을 언제 쓰느냐가 다릅니다. 만들 것이 정해진 다음에는 연장에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물건이 섭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들지 정하는 자리에서 연장에 맞추면, 그때부터 갇힙니다. 같은 말인데 자리가 다릅니다.


그러니 연장은 가만히 있습니다. 대패는 저를 가둔 적이 없습니다. 제가 대패에 맞춰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연장을 바꾸면 되는가. 저는 CNC를 쓰고, 치수만 넣으면 도면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손으로 못 내던 형태가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같은 함정이 있습니다. 엔드밀 지름이 정하는 최소 반경이 있고, 고정 방식이 허용하는 크기가 있습니다. 넣어둔 규칙 밖은 못 만듭니다. 연장만 바뀌고 순서는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연장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아는데도 도구에 맞춰 깎습니다.

그러니 이건 해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계란이 조금 눌렸을 겁니다. 다만 눌릴 때 알아차리기라도 하려고 이렇게 적어둡니다.

평목 블로그의 글과 기록은 출처(pyeongmok.com)를 밝히고 자유롭게 인용 및 발췌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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