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 전통창호, 왜 이 말이 이렇게 흐릿한가
이 시리즈 · 따져 봅니다 · 3화 (전체 4화)
"오래 굳은 것일수록 한 번 더 들여다봅니다"
- 1화 솟을창인가, 소슬창인가 — 올바른 표기와 어원
- 2화 도깨비는 뿔이 없다
- 3화 상편 — 전통창호, 왜 이 말이 이렇게 흐릿한가
- 4화 하편 — 전통창호, 조상이 만든 그대로여야 하는가
상편 — 전통창호, 왜 이 말이 이렇게 흐릿한가
저는 창호를 짭니다.
그런데 전통창호를 만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작업대 위의 창에는 전통창호라는 이름이 없습니다. 오늘 짜는 것은 띠살이고, 다음 주에 짤 것은 세살입니다.
주문을 받을 때도 그렇습니다. 띠살 하나 해 주세요, 꽃살로 해 주세요. 전통창호 하나 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공방에 없습니다.
이 말은 공방 문을 나서야 들립니다. 간판에서, 광고에서, 검색창에서요.
그런데 문밖에서 이 말이 가리키는 물건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면, 이상한 것은 제가 아니라 이 말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옛 창 모양을 본뜬 알루미늄 새시가 전통창호로 팔립니다. 나무로 만들기만 한 창도 전통창호로 팔립니다.
살을 하나하나 짜서 맞춘 창도 전통창호로 팔립니다.
재료가 다르고, 만드는 법이 다르고, 값이 열 배씩 차이 나는 물건들이 같은 이름표를 달고 서 있습니다.
한 이름이 이렇게 여러 물건을 가리키면, 그 이름은 사실 아무것도 가리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흐릿할까요. 저는 이 말의 족보를 따져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흐릿한 게 당연했습니다.
이 말은 태어날 때부터 만드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傳統)이라는 한자어 자체는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뜻이 지금과 달랐습니다. 전할 전에 계통 통 — 왕위나 가문의 정통을 이어 전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주어가 왕조였던 조선 사람에게 전통은 임금의 계보에 붙는 말이었지, 창이나 밥상에 붙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창을 발주할 때는 창마다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뜻 —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습과 문화 일반 — 은 근대의 번역어입니다.
십구세기 말 일본이 서양말 tradition을 옮기면서 이 낡은 한자어를 꺼내 새 뜻을 입혔습니다.
사회가, 문화가, 개인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요. 이때 주어가 왕조에서 민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말이 이십 세기 초에 우리말로 들어와 식민지의 시간을 지나며 뜨거워졌고 , 1962년 문화재보호법과 함께 행정의 말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전통인지 나라가 지정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가 만든 범주를 시장이 받아 썼습니다.
전통찻집, 전통혼례, 전통한과 — 전통 두 글자가 품질 표시처럼 명사 앞에 붙기 시작했고, 그 행렬 끝 어딘가에 전통창호가 있습니다.
전통이라 불리는 것들 상당수가 실은 근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밝힌
역사가들이 있습니다. 에릭 홉스봄이 『만들어진 전통』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아득한 옛것인 줄 알았던 스코틀랜드 격자무늬 치마가 백몇십 년 전 발명품이더라는 식이지요.
저는 거기에 하나를 보태고 싶습니다. 만들어진 것은 전통들만이 아닙니다. 전통이라는 말 자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정리하면, 이 말은 왕조의 말로 태어나 번역어가 되었다가, 민족의 말이 되었다가, 행정의 말이 되었다가, 마케팅의 말이 되었습니다.
주인이 다섯 번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만드는 사람의 말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조선의 목수도 이 말로 창을 부르지 않았고, 지금의 목수인 저도 부르지 않습니다.
바깥에서 씌운 이름이 초점이 흐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버리면 될까요.
그러기엔 이 말이 너무 널리 쓰입니다. 저부터도 손님 앞에서 이 말을 피해 갈 재간이 없습니다.
버릴 수 없다면 따져서 벼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흐릿한 말에 사람들이 그나마 갖고 있는 답,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그 답부터 따져야 합니다.
전통창호란, 조상 목수가 만든 그대로 만든 창인가.
다음 글에서 이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 저는 같은 창을 두 번 짜 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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