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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이 없는 일

This series · Back at the Bench · No. 7 (7 episodes total) Ongoing

"Writing down the thoughts that come while I build."

  1. No. 1 The Work of Pyeongmok
  2. No. 2 Buddha's Palm
  3. No. 3 Still Building, Today Too
  4. No. 4 Keep Changing the Form, and the Difference Gets Buried in Noise
  5. No. 5 Before the Saw's Path Sets
  6. No. 6 Afraid I'm Thinking to Fit My Own Skill
  7. No. 7 평균이 없는 일

오늘 신문에서 AI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AI가 수학 난제를 풀었고, 안 쓰는 구독을 알아서 해지까지 해 준다는 내용입니다. 기사 중간에 익숙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진기가 처음 나왔을 때 들라로슈라는 화가가 "이제 회화는 죽었다"고 했다는 일화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대목에서 신문을 내려놓고 한참 딴생각을 했습니다.

카메라는 원래 그림 도구였습니다. 깜깜한 방에 구멍 하나를 뚫으면 바깥 풍경이 반대편 벽에 거꾸로 비칩니다. 화가들은 그걸 보고 따라 그렸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을 썼습니다. 비친 그림은 남지 않으니 손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다 1839년에 그 그림을 약품으로 붙잡아 두는 방법이 나왔습니다. 손이 없어도 그림이 남게 된 겁니다.

화가들이 정말 겁을 먹은 건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도구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손이 빠져도 되니까요.


컴퓨터도 저한테는 오래 그런 도구였습니다. 계산을 시키고 도면을 그리게 했지만, 뭘 그릴지는 제가 정했습니다. 요즘은 좀 다릅니다.

말 한 줄 넣으면 결과가 그냥 나옵니다. 1839년 비슷한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AI는 평균을 잘 잡습니다. 수많은 자료의 한가운데를 찾아냅니다. 그래서 무난하고,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


색도 평균으로 잡아 놓은 게 있습니다. 백 년쯤 전 영국에서 열몇 명한테 색을 맞춰 보게 하고, 그 사람들 눈을 평균 내서 '표준 관찰자'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지금 쓰는 색 표준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눈은 세상 누구의 눈도 아닙니다.


빛에는 원래 색이 없습니다.

파장만 있습니다. 빨강은 그 파장이 눈을 거쳐 머릿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벌은 벌대로, 개는 개대로 보고, 사람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봅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색은 계속 바뀝니다. 우리는 하늘도 푸르다 하고 풀도 푸르다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란 눈은 그 둘을 굳이 나누지 않습니다.

물감을 오래 만진 사람은 남들이 그냥 회색이라고 하는 걸 몇 가지로 나눠서 봅니다. 뭔가를 갖고 싶어지면 그 색이 자꾸 눈에 띕니다.

나이 들면 눈 속 수정체가 누레진다고 합니다. 젊을 때 보던 파란색을 저는 이제 그대로 못 보는 셈입니다.

그러니 남이 보는 빨강과 제가 보는 빨강이 같은지 모릅니다. 어제 제가 본 빨강과 오늘 보는 빨강도 같다고 자신 못 하겠습니다.


나무도 비슷합니다. 목공에도 치수가 있고 짜임의 법이 있지만, 나무 자체에는 평균이 없습니다.

한 나무에서 켠 판인데도 결이 다르고 옹이 자리가 다르고, 마르면서 갈라지는 방향도 다릅니다. 도면은 같아도 나무는 매번 다릅니다.


다 만든 뒤에도 나무는 계속 변합니다. 소나무는 처음엔 하얗다가 해가 지날수록 누렇게 깊어집니다.

여름에 습기가 차면 냄새가 다시 올라옵니다. 손에 닿는 느낌도 해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냄새는 맡자마자 어릴 적 어느 날로 데려가기도 합니다.


이런 건 기계가 못 합니다. 단맛을 글로 쓸 수는 있어도 혀가 없으니까요. 기계가 만든 건 저장하는 순간 멈춥니다.

나무는 집에 달린 뒤에도 그 집 사람과 같이 나이를 먹습니다. 그동안 그걸 보는 사람 눈도 같이 변하고요.


저는 코드도 짜고 디자인도 했고 그림도 그렸습니다. 사진도 알고 인상주의도 압니다.

전부 기계가 밀고 들어오는 자리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목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계가 싫어서 온 건 아닙니다. 저희 공방은 CNC로 창호를 짭니다. 평목 스튜디오라는 설계 도구도 제가 만들었습니다.

누구든 자기 방을 생각하며 무늬를 그리면, 말로 적어도 되고요, 엔진이 짜임의 법에 맞춰 그 사람만의 도면을 냅니다.

그 도면이 공방에 오면 나무가 됩니다.


창호 하는 분들 사이에는 "디자인은 정해진 것"이라는 생각이 꽤 깊습니다. 엔진은 사실 그 말에 대답하려고 만든 겁니다.

공간이 다 다른데 창이 다 같을 이유가 없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엔진도 못 하는 게 있습니다. 엔진은 "어떤 무늬가 좋으세요" 하고 묻기만 합니다.

답은 그리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평균적인 걸 고르면 엔진은 평균적인 걸 그려 줍니다.

색이 자라면서, 배우면서, 바라면서 바뀐다는 건 눈이 길러진다는 뜻입니다.

잘 길러질 수도 있고 엉뚱하게 길러질 수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화면이 골라 주는 색과 집과 무늬만 보고 살면, 눈도 그 평균을 닮아 갈 겁니다.

저는 기계가 평균을 잡는 것보다 그게 더 걱정입니다.


사진기가 나오고 나서 화가들은 무엇을 볼지, 왜 그렇게 볼지를 붙들었습니다. 지금 우리한테 남은 일도 그쪽 같습니다.

직접 만져 보고 맡아 보고 오래 보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색을 좋아하는 게 내 삶에서 온 건지 화면에서 온 건지 한 번쯤 따져 보는 것.


공방에서 판 하나를 고를 때 저는 몇 번을 뒤집어 봅니다. 어느 면을 방 쪽으로 낼지 정하는데, 그 판단은 도면에도 엔진에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것을 보며 늙어 가는 제 눈이 합니다.

요즘 무언가를 고를 때, 그 눈이 누구 눈인지 한 번쯤 물어보셨으면 합니다.

신문을 읽다 말고 생각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Source: CIE 1931 표준 관찰자 — W. D. Wright (1928–29), J. Guild (1931) 등색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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